프라임 이모션
현실 앵커 오류 보고서
2장 — 안정된 세계
민우는 접속 시간이 늘어나는 걸 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HYDRA는 분명 잘 만든 콘텐츠였고,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잘 만들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퇴근 후 한 시간.
그게 민우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최대치였다.
[현실 앵커: 이 환경은 가상입니다.]
문구를 확인한 뒤에야 민우는 자신의 감각 리듬을 정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시는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했다.
현실이라면 퇴근 시간대에 느껴질 법한 혼잡함이나 피로감이 이곳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동 경로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갈라졌고, 소리는 언제나
‘기분 좋은 밀도’로만 전달됐다.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
“여기 사람들… 좀 이상하지 않냐?”
민우의 말에 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NPC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민우는 노점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 우리가 멈추면 항상 한 박자 늦게 움직여.”
형우는 잠깐 시선을 주더니 웃었다.
“그냥 연산 타이밍 문제겠지.”
연산.
민우는 그 단어가 이 공간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곳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지연도, 실수도 없었다.
현실보다 더.
퀘스트는 단순했다.
- 분실된 아이템 찾기
- NPC 간 갈등 중재
- 제한 시간 내 이동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퀘스트의 방향은 비슷했다.
갈등을 최소화하라.
“굳이 위험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어요.”
“이쪽이 모두에게 더 편안한 길입니다.”
NPC들의 말투는 조금씩 달랐지만, 전달되는 감정은 거의 같았다.
불편해질 이유가 없다.
민우는 선택지 앞에서 멈춰 섰다.
A. 혼잡한 시장 골목
B. 우회로
게임적으로 보면
A가 보상이 크고,
B가 안전했다.
민우는 잠시 생각했다.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잖아.
그는 B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가슴 안쪽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편안하다는 표현이 가장 가까웠다.
“어?”
형우가 웃으며 말했다.
“느꼈지?”
“뭘?”
“선택하면 기분 좋아지는 거.”
민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 보정: 적용됨]
아주 짧게, 시야 하단을 스치듯 문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민우는 본능적으로 그 위치를 다시 바라봤다.
“야, 방금 뭐 떴어.”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문구는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시간이 흐르자 민우는 스스로 깨달았다.
선택지를 고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는 걸.
망설임이 줄어들었고, 확신은 너무 쉽게 따라왔다.
굳이 고민할 필요 없잖아.
그 생각은 어색하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민우는 일부러 불편한 선택지를 골라봤다.
좁고, 어둡고, 위험 확률이 높은 골목.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왜 이렇게 싫지…”
그리고 동시에—
[현실 앵커: 이 환경은 가상입니다.]
앵커 문구가 이전보다 또렷하게 인식됐다.
민우는 일부러 그 문장을 의식하며 걸었다.
그러자 답답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형우.”
“응?”
“너는 선택할 때 뭐 보고 고르냐?”
형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냥… 느낌?”
“느낌?”
“응. 여긴 그게 제일 정확해.”
민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게 네 생각인지, 아니면—”
“야.”
형우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너 너무 어렵게 생각해.”
그는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편한 게 좋은 거지.”
편한 게 좋은 거.
그 말이 민우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풀이됐다.
로그아웃 직전.
민우는 마지막으로 접속 기록을 확인했다.
플레이 시간: 1시간 12분
스트레스 지수: 감소
감정 안정도: 상승
모든 지표가 ‘이상적’이라는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 아래, 익숙하지 않은 항목 하나.
결정 일관성: +18%
“이건 뭐지…”
민우가 그 항목에 의식을 두자 간단한 설명이 떠올랐다.
사용자의 선택 패턴이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민우는 더 보지 않고 환경을 종료했다.
현실로 돌아온 방은 조용했고, 어두웠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까보다 덜 불안했다.
오늘 하루도 별일 없었지.
그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건지, 아니면 남겨진 건지—
민우는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게임 맞나?”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아주 조용히 하나의 기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편한 선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은 아무도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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