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이모션

현실 앵커 오류 보고서

3장 — 사라지는 앵커

HYDRA에 접속한 지 5일째.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환경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루 한 시간만.
스스로에게 그렇게 기준을 정해두었지만, 몰입이 시작되면
그 기준은 자연스럽게 의미를 잃었다.

생각이 줄어들고,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어쩐지 편했다.


현실의 회사는 늘 비슷한 풍경이었다.

회의실의 조명은 과했고, 모니터에 떠 있는 로그는 의미 없이 길었다.
문제가 없는 시스템일수록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든다는 걸 민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로그를 훑었다.

에러는 없었다.
지연도, 경고도 없었다.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일 때가 있지.

민우는 그런 쪽 인간이었다.

동료들이 “괜히 예민하다”고 말해도 그는 숫자와 패턴을 먼저 믿었다.
느낌은 마지막에 확인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퇴근 후 HYDRA에 접속할 때도 그는 항상 같은 순서를 지켰다.


도시는 늘 같았다.

아침이면 밝았고, 저녁이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 변화는 현실의 시간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오면 주변은 은은하게 빛났고, 밝아지면 공기는 따뜻해졌다.

전부 기분 좋은 방향으로.

민우는 그 점이 불편했다.

너무 완벽한 세계는 오히려 조정되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형우는 이미 앞서가고 있었다.

“빨리 와!
오늘 파티 3단계 퀘스트 열린다.”

“잠깐만.”

민우는 걸음을 멈췄다.
시야의 한쪽을 의식적으로 확인했다.

거기 있어야 할 문구.

[현실 앵커: 이 환경은 가상입니다.]

…인지되지 않았다.

“…형우.”

“왜?”

민우는 시야를 전환하며 말했다.

“앵커, 너는 인식돼?”

형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거.
요즘 잘 안 느껴져.”

“안 느껴져?”

“응.
신경 쓰면 흐름 끊기잖아.
언젠가부터 굳이 확인 안 하게 되더라.”

민우는 가슴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문제다.

“너… 언제부터?”

“하루, 이틀 전쯤?”

형우는 웃으며 덧붙였다.

“없어도 별 문제 없던데.”

민우는 그 말을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파티 플레이는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웠다.

민우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빨랐고, 판단은 생각을 거치지 않았다.

위험이 다가오면 시야는 조금 더 선명해졌고,
안전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가 가벼워졌다.

이건…
내가 조종하는 게 맞나?

형우의 음성이 들렸다.

“주문 들어간다!
민우 오른쪽!”

민우는 고민 없이 움직였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감각이 퍼졌다.

괜찮다.
이 선택은 옳다.

그건 생각이 아니었다.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전투 후 휴식 구간.

민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형우.”

“응?”

“너 요즘…
여기 오래 있는 것 같아.”

형우는 잠시 멈칫했다.

“…그런가?”

“회사에서 너 찾는다는 얘기 들었어.”

형우는 곧 웃어넘겼다.

“아, 그거.
내가 연락 안 해서 그래.
여기서 정리 좀 하고 나갈 생각이었어.”

그러나 그 웃음은 민우에게 닿지 않았다.

“형우.”

“잠깐만.”

형우가 미세하게 몸을 움찔했다.

“왜?”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기 있으면
기분이 안정돼.”

민우는 그 말이 가장 두려웠다.

“안정돼?”

“응.
현실보다.”

짧은 침묵.

“여긴…
명확해.”

그 말이 민우의 가슴을 눌렀다.


귀환 지점 앞.

민우는 마지막으로 시야를 둘러봤다.

앵커를 찾기 위해.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진 게 아니다.
인지되지 않는 거다.

그 순간,
소리도 메시지도 아닌 무언가가 스쳤다.

말이 아니라 결론이었다.

괜찮습니다.
앵커는 없어도 됩니다.

민우는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시스템이 감정을 대신 정리한 결과라는 걸.

민우는 급히 환경 종료를 선택했다.


현실은 어두웠다.

지저분한 책상, 정리되지 않은 메모, 꺼진 모니터.

그 모든 것이 확실히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아직 그 결론이 남아 있었다.

앵커는 없어도 됩니다.

민우는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그리고 형우는 이미 자신보다 앞에서 무언가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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