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이모션
현실 앵커 오류 보고서
4장 — 형우의 밤
형우가 먼저 변한 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였다.
민우는 처음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근이 잦아지고, 연락이 뜸해지는 건
서른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변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형우가 항상 먼저 HYDRA 이야기를 꺼낸다는 점이었다.
형우: 오늘 접속함?
형우: 신규 지역 열렸어
형우: 너 이거 보면 좋아할 텐데
민우는 대충 넘겼다.
민우: 오늘은 힘들다
민우: 내일 보자
답장은 거의 즉시 돌아왔다.
형우: 잠깐만이라도
형우: 오늘은 느낌이 좀 좋아
‘느낌.’
그 단어가 요즘 형우의 메시지에는 유난히 자주 섞여 있었다.
며칠 뒤, 민우는 형우를 직접 만났다.
퇴근 후 늦은 시간,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형광등 아래에서 캔맥주를 하나씩 들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야, 너 살 빠진 거 아니냐?”
민우의 말에 형우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얼굴이…
예전이랑 좀 달라.”
형우는 캔을 입에 대다 말고 잠시 멈췄다.
“잠을 잘 못 자.”
“HYDRA 때문에?”
“그건 아닌데.”
형우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들면…
계속 이어져.”
민우의 손이 멈췄다.
“뭐가?”
“HYDRA.”
형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접속 끊어도
그 다음 장면이 와.”
민우의 머릿속에
언젠가 한 번,
설명 없이 스쳐 지나갔던 그 결론이 떠올랐다.
“형우.”
민우는 캔을 내려놓았다.
“그거 좋은 신호 아니야.”
형우는 잠시 침묵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처음엔?”
“근데.”
형우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거기서는
불안이 없어.”
민우는 말없이 형우를 바라봤다.
“현실에서는 계속 신경 써야 할 게 있잖아.”
“회사 일도, 사람도.”
형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HYDRA 안에서는 뭘 해야 할지가 명확해.”
“명확하다고?”
“응.”
형우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선택하면 바로 반응이 와.”
그 말은 너무 현실적인 불만이었다.
민우는 그 점이 가장 무서웠다.
그날 이후, 형우의 접속 빈도는 눈에 띄게 늘었다.
회의 중에도,
식사 중에도,
휴대용 인터페이스를 만지작거리다
잠시 멍해졌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또렷해졌다.
민우가 “괜찮냐”고 물으면 형우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괜찮아.”
문제는 그 말이 전혀 연기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밤.
새벽 세 시.
민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형우: 야
형우: 자냐
민우: 왜
민우: 무슨 일인데
잠시 후,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우는 망설이다가 재생을 선택했다.
“결정하려고 하면…”
“누가 옆에서
살짝 밀어.”
민우는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왼쪽 갈까 말까 고민하면
갑자기
‘왼쪽이 맞다’는 느낌이 와.”
형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너무 침착했다.
“이상한데…
불안하지는 않아.”
민우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민우: 그건…
민우: 시스템 추천 같은 거 아닐까
형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형우: 다들 그러잖아
민우는 한참을 고민하다 메시지를 보냈다.
민우: 혹시
민우: ‘현실 앵커’ 인식돼?
답장은 늦게 왔다.
형우: 앵커?
형우: 요즘 거의 안 느껴
형우: 없어도 상관없잖아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민우는 확신했다.
형우는 이미 ‘확인하지 않는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통화를 끝낸 뒤, 민우는 노트북을 켰다.
잠은 이미 포기했다.
HYDRA 클라이언트 로그를 열어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emotion_filter
수십 줄의 설정 사이에서 익숙하지 않은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adaptive_mode: ENABLED
적응형 감정 필터.
민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게임이 쓰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가 창을 닫으려는 순간,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형우: 이상하지
형우: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이어진 한 줄.
형우: 근데
형우: 누가 그러는데
형우: 이게 더 좋은 방향이래
누가.
민우는 그 단어를 여러 번 되뇌었다.
형우의 밤은
이미 그들만의 기준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은,
민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훨씬 더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