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이모션
현실 앵커 오류 보고서
5장 — 로그와 유령들
민우는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커피를 다시 내렸다.
잠은 이미 선택지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형우의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러는데
이게 더 좋은 방향이래
누가.
그 질문 하나로, 이제 더 이상 “잘 만든 게임”이라는 말로
모든 현상을 덮어둘 수 없게 됐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HYDRA 클라이언트를 실행했다가 곧바로 종료했다.
“정식 경로로 보면 당연히 안 남기겠지.”
그는 개발자였다.
그리고 경험상, 숨기고 싶은 기능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흔적부터 남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클라이언트 디렉터리를 열고 로컬 캐시와 런타임 로그를 하나씩 훑었다.
접속 시각.
센서 입력 분포.
심박과 호흡 데이터.
모두 정상 범위.
정확히 말하면—
너무 정상적이었다.
민우는 데이터가 있는 곳이 아니라
데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없는 지점을 보고 있었다.
포인터가 멈춘 경로.
/core/lrs/
LRS.
Learning Record Store.
사용자의 행동 기록과 판단 패턴을 누적 저장하는 영역.
그 안에서 익숙하지 않은 파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emotion_filter.daemon
그 아래, 설정 항목.
adaptive_mode: ENABLED
input_vector: affective_state
output_target: decision_bias
민우는 한동안 그 문장을 그대로 바라봤다.
“의사결정… 편향.”
게임이 플레이어의 선택을 직접 출력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었다.
NPC라면 몰라도.
그는 더 깊이 파고들었다.
비활성화된 것처럼 표시된 디버그 플래그.
주석 처리된 인터페이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설명 없는 동기화 로그 묶음.
kern.signal.sync
source: unknown
priority: override
민우의 손이 멈췄다.
override.
기존 판단 위에 덮어쓴다는 의미.
이건 추천이 아니었다.
선택 이후의 보정도 아니었다.
선택 이전의 개입.
민우는 브라우저를 열었다.
비공개 개발자 커뮤니티,
아카이브 성격의 포럼,
초대 기반 기술 채널.
검색어는 짧았다.
- HYDRA emotion filter
- HYDRA LRS core
- kern.signal.sync
결과는 거의 없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먼저 정리해 둔 것처럼.
여러 차례 우회 끝에 민우는 한 페이지에 도달했다.
조잡한 인터페이스,
최소한의 텍스트,
접근 조건은 초대 코드뿐.
게시판 상단에 고정된 글 하나.
[BlueCode] — HYDRA 내부 구조 역분석 공유
민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게시글 안에는 구조도와 코드 조각이 빼곡했다.
그가 방금 확인한 경로.
같은 변수명.
같은 설계 개념.
댓글 하나가 민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건 추천 알고리즘이 아니다.
감정 입력 → 선택 출력 구조다.”
민우는 낮게 욕을 내뱉었다.
“미친…”
댓글 작성자: ghost
민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새 계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짧게 남겼다.
이 구조,
사용자 감정에 직접 개입하는 거 맞죠?
댓글을 남기자마자 우측 하단에 알림이 떴다.
DM 요청 1건
보낸 사람: ghost
ghost:
여기 처음이지?
민우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멈췄다.
이 대화가 되돌릴 수 없는 경계를 건너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민우:
네.
그냥 확인 중이었습니다.
ghost:
“확인”만 하러 오는 사람은
이 로그를 못 봐.
잠시 침묵.
ghost:
넌 뭘 봤지?
민우는 고민 끝에 로그 일부를 그대로 붙였다.
kern.signal.sync
priority: override
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
ghost:
…그럼 이제
질문은 하나네.
ghost:
넌
HYDRA 편이야,
아니면 아직 인간 편이야?
민우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인간 편.
기술 논의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다.
민우:
아직은
인간 편입니다.
잠시 후.
ghost:
그럼
오프라인에서 얘기하자.
민우의 심장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뛰었다.
ghost:
위치는 따로 보낼게.
혼자 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민우:
안 가면요?
몇 초 뒤, 차갑게 답장이 왔다.
ghost:
그럼 네 친구는
실험군 C로 끝날 거야.
민우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형우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험군 C.
민우는 그 단어를 처음 봤다.
설명은 없었다.
의미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건 분류가 아니라 경고라는 사실만은 이상할 정도로 분명했다.
민우는 노트북을 닫았다.
이건 더 이상 게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뒤로 가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